5.2. 필리아

Philia

밀레니얼 세대는 유연한 사랑의 세대이다. - 지그문트 바우만, <액체세대>(2020)

이해와 오해, 분노, 불안, 고통, 혐오, 대립 그리고 사랑에 이르기까지, 이처럼 개인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인간의 여러 감정들은 타인과의 소통을 전제로 한다. 타인의 부재로부터 비롯하는 외로움 또한 결국 소통이 없으므로 형성되는 감정이다. 그러한 점에서 사람은 소통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이며, '소통'하는 동물로서 인간의 소통 '행위'는 그 개인의 삶과 사회의 기초를 형성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소통, 즉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이란 단어는 ‘함께 나눔’을 뜻하는 라틴어 커뮤니스(communis)에서 유래하며, 아리스토텔레스는 공동체(community) 사회에서 이상적인 소통에 이르기 위한 조건을 사랑(philia)이라고 말했다.

필리아 우리말로 필리아는 친애, 우애, 우정 등으로 번역하기도 하는데, 필리아가 추구하는 사랑은 에로스나 아가페처럼 일방적인 관계가 아닌 서로 평등한(대등한) 관계를 지향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필리아가 성립되기 위한 조건으로서는 ‘순수성’, ‘상호성’, ‘인지성’을 이야기 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이 기술의 발달로 인해 타인과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방법이 획기적으로 다양해진 시대에는 어쩌면 ‘매체성’, 즉 소통을 매개하는 기술로서 ‘미디어’라는 요소가 더 추가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철학자 빌렘 플루서는 미디어 현상학을 다루면서 미디어의 개념을 ‘상징 체계인 코드가 그 안에서 작동하는 구조’라고 정의하였다. 그에 따르면 선사시대의 마술적 의식으로부터 시작한 ‘그림’ 코드는 서구사회의 오랜 전통인 형상 숭배에 대한 투쟁의 결과로 '텍스트'로 진화하였으며 이때부터 인류는 문자로 만들어진 문명과 역사의 시대를 살게 된다. 하지만 텍스트의 불투명성은 근대의 이성과 과학기술에 의해 탄생한 사진술의 등장으로 그 허구성이 드러나면서 ‘기술적 형상’으로의 코드 전환이 이루어지게 된다.

탈-역사의 시대 기술적 형상에 의한 이미지는 과거 그림이 세상을 모방했던 방식이 아니라, 텍스트를 대신해 기표의 자리를 차지한 기호화된 이미지를 뜻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현재를 탈문자의 시대라고도 부르는데, 뉴미디어 시대의 기술적 상상력은 기술적 형상을 전혀 다른 차원의 언어와 새로운 소통의 구조로 만들어 냈다. 1999년 구리타 시게타카(Kurita Shigetaka)가 인간의 모든 감정 표현에 기대어 만든 178개의 이모지는 상대방에게 정보를 전달하기 보다는 어떠한 경험과 생각을 함께 한다는 뜻에 더 가까우며, 어휘 체계가 아닌 보다 유연한 유니코드 체계를 이용해 만들어진 이모지는 오늘날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고 인종차별과 양성 불평등의 문제를 극복하자는 세계인의 보편적 가치관을 담은 세계 공용어가 되었다. 지난 2015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연두 교서가 이모지로 제작되면서 세계적으로 화제가 된 적이 있는데, 이 진지한 그림 문자의 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흥미롭거나 난해한 것 이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때 사람들이 경험한 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텍스트를 통해 배운 역사가 아닌 새로운 역사가 될 것이라는 점에서 탈-역사적인 순간이었다.

Last updated